세부 작업기록

2026
〈아직 키스는 못 해봤지만〉 작업 기록 삽화

시작

작년 여름에 과 행사로 이효석 문화마을을 답사 갔다 온 뒤로 알게 된 학교 사람들이 있다. 과내 연극 동아리 무대섬. 다들 활기차 보였다. 무엇보다 술을 즐겼고, 이건 나에게 큰 메리트였다. 당시 동아리장이던 예은이는 술자리에서 바로 나를 무대섬 단톡에 초대했고 (진탕 마신 난 그날 최애 안경도 잃어버렸다), 그렇게 함께 가끔씩 술도 마시고 국립극단 연극도 보러 다니면서 친해졌다.

작년 2학기가 끝이 나고, 매년 하는 것처럼 1학기 개강하는 시점에 무대를 하나 올릴 건데 같이 해보지 않겠냐고 예은이가 말했다. 인원은 모집 중이란다. 나는 당시에 휴학을 결심하고 학원 일이나 해야지 생각 중이었는데, 학원 실장까지 맡게 돼서 고민이 많았다. 연극을 올려보지 않았어도 알 수 있는 건, 이걸 하게 된다면 연극이 끝나기 전까지 나의 일상은 없겠구나 싶었다. 그렇게 몇 번 거절하고 다시 제안이 왔을 때는 연출을 맡게 된 준서 형의 제안이었다.

형, 나 해도 일주일에 세 번밖에 못 나올 수 있어.
흠 ㅇㅋㅇㅋ 그러면 스텝으로 좀 도와줄 수 있어?
행님이 필요하시다면 그래야지요.

그렇게 하게 됐다. 거창한 명분 없이도 일은 항상 사소하게 시작된다. 그리고 후회… 모인 인원은 5명. 연출 나, 그리고 25학번 홍규, 경모, 시우. 준서 형은 창작극을 하고 싶다 했고, 각본은 아직 작성 중이었다. 이건 도저히 불가능이라 생각한 난 도망칠 궁리를 했다. 도망치려면 명분이 있어야 한다. 명분을 생각해 보니 25학번 애들 얼굴만 생각났다. 그래서 마음을 다잡고… 조연출을 맡게 됐다.

뭘 해도 '조'가 붙은 역할은 고생이다. 왜냐하면 연출과 그 외 인원의 니즈를 모두 충족시킬 만큼의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연기와 무대를 봐야 하기에 정신 없는 연출을 대신하여 그 외 것들을 담당한다. 나의 경우엔 그것 영상 음향, 스냅샷 촬영, 포스터 제작, 홍보, 무대 소품 의상 … 등이었다. 다행히 25학번 재명이가 나중 가서 합류하였고, 덕분에 무대 소품, 의상, 조명은 유일하고 든든한 스텝, 재명이가 주로 담당하게 됐다.

영상 · 음향

각본의 초안을 읽으며 들었던 생각은 준서 형의 연출 스타일이 내가 시도해 보고 싶었던 연출 스타일과 비슷하다는 거였다. 꿈(비현실)과 현실. 3인극이라는 한계를 어떻게든 깨기 위한 1인 다역 등, 배우가 셋이기 때문에 해야 했던 것들이 내가 해보고 싶었던 것과 맞물려서 초안을 보면서 이런저런 많은 제안을 할 수 있었다.

우선적으로 영상물을 제작하여 쓰고 싶었다. AI 영상과 숏폼의 지나치고 정신없는 특성을 가져와, 지엽과 본질을 항상 오가는 주인공의 대사와 결부시키면 재밌겠다고 생각했다. 무엇이 진짜고 가짜인지 알 수 없는 상황 속에서 관객이 보았을 때 주인공의 대사와 정신없는 영상 중 무엇을 더 기억할 수 있을까 궁금하기도 했다. 다행히도 연출의 허락이 떨어졌고 영상물을 내가 제작하기로 했다.

자신의 본질과 예술은 무엇일까 고뇌하는 주인공의 7분이 넘는 인트로 독백 이후에 나오는 영상이었기 때문에 저 고민이 얼마나 무의미해 보이게 만들지에 집중했다. 'Brainrot'이 되기 위해선 더 이상 내가 뭘 보는지 현실과 구분이 안 되어서 구분하기를 포기하는 지점까지 다다를 필요가 있었다. 때문에 datamosh, uncanny valley 효과들 그리고 허접한 AI 제작 영상들을 합쳐볼까 했지만 30초 안팎으로 임팩트를 줘야 했기에 이 정도로 만족했다. AI 영상이라고 하면 가장 먼저 언급되는 윌 스미스의 스파게티 먹방 영상의 초기 버전과 2026 현재 버전을 앞뒤로 배치하면서 발전 속도의 무서움을 언급하고자 하는 숨은 의도도 있었다. 개인적으로 “Umm… That's the good stuff!”이라 말하는 AI 윌 스미스의 마지막 대사가 참 좋았다. 기괴하고 무서워서.

이 외에도 대사 중에 맥그리거와 할머니 100명의 첨예한 대립에 대한 이야기가 있어서, 시댄스 2.0를 결제해 AI 영상도 제작해 보았다. 배틀 시뮬레이터 같은 실제 시뮬레이션을 구현해 볼까 싶었지만, 그것보다는 확실한 시각적인 충격을 줄 수 있는 영상물이 낫겠다 생각하여 위 영상으로 만족하였다.

이 외에도 진지한 극 내용과는 별개로 갑자기 무한도전 영상이 나오고, 한강의 수상 장면을 틀면서 이에 불평하는 주인공의 모습과, 남자 배우 둘이서 라라랜드 춤을 추고, 영화 <애니홀>의 오프닝 영상을 틀면서 탈모를 이야기하는 장면들이 있었다. 각색이 아닌 창작극이기에 나 또한 계속 제안하고 연출과 함께 맞춰볼 수 있던 부분이 많았다.

영상·참고 이미지

스냅샷

작년 무대섬(팀 오리무중)의 스냅샷이 퀄리티가 상당했기에, 개인적으로 절대 뒤처지고 싶지 않다는 의지가 있었다. 그래서 내가 믿고 맡길 수 있는 친구에게 촬영을 부탁하고 싶었다. 그러던 와중 나와 영화과 입시를 함께 했던 양지훈 작가의 작업물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군인이었던 지훈이는 말년 휴가를 나오는 타이밍이 우리가 촬영 날짜로 생각하던 일자랑 겹치면서 흔쾌히 페이도 낮춰주면서 우리를 도와주었다.

그에게 미안하게도 촬영 기획부터 촬영 날 당일까지 불안했던 건 장소였다. 처음 촬영 컨셉을 기획했을 땐 정장을 입은 채로 오방색을 담을 수 있는 절에서 촬영하길 원했지만, 국민대 근처 절에게 전부 거절 당했다. 결국 교내에 산이 있으니 그곳을 배경으로 하자면서 위로 삼던 와중에, 재명이가 우리 학교 안에도 절이 있다면서 삼봉정사에 찾아가 당일 허락을 맡고 찍게 되었다. 날도 안 풀렸는데, 비도 추적추적 내려서 다들 벌벌벌 떨면서 촬영했다. 결과는 뭐, 난 지훈이를 믿고 있었다…

계획된 장소에서의 촬영도 아니었기에 현장에서 나오는 아이디어로 이리저리 찍었고, 그걸로 뛰어난 사진들을 건질 수 있었다. 정리하자면, 샤라웃 투 양지훈 and 쿨한 삼봉정사 스님.

삼봉정사 스냅샷 촬영 1
삼봉정사 스냅샷 촬영 2
삼봉정사 스냅샷 촬영 3
삼봉정사 스냅샷 촬영 4
삼봉정사 스냅샷 촬영 5

포스터

스냅샷을 찍은 뒤 급하게 홍보물 제작에 들어갔다. 제목이 <아직 키스는 못 해봤지만>으로 확정난 뒤로 가장 머리가 아팠던 것은 포스터였다. 제목과 장르적 특성을 살려서 포스터 제작을 하기엔 신입생들이 안 보러 올듯 했다. 그렇다고 너무 동떨어질 순 없었다. 그래서 직접 그린 그림으로 제작하기로 했다. 아기자기하지만 독특한 느낌의 포스터를 제작하고 싶었다.

포스터 시안 2

1안처럼 무질서하게 배치시킬까, 2안처럼 정렬 속에서 빈 공간을 남겨 시선을 끌까 고민했다. 팀 내에서도 의견이 반반 갈렸는데, 개인적으로 정렬 안 미완성의 느낌이 좋아서 2안 포스터를 인쇄했다. 붓 펜과 컴퓨터용 사인펜으로 그린 그림을 Adobe Scan을 통해 스캔 뜬 다음에 이의 배경을 제거하면 doodle 느낌이 나는 그림들을 완성할 수 있다. 이러한 디자인 기법은 나의 독서 토론 동아리 BOOKER의 로고에도 썼었다.

BOOKER 로고 등 낙서 스타일 그래픽

아 그리고 포스터에 역할을 뭐로 적을까 고민하다가 재명이와 나를 하나로 묶고 싶어서 '비주얼'이라고 썼는데 Visual Directing이 아닌, 얼굴마담으로 이해한 사람들이 있다고 전해 들었다. 존나 억울한 상황이 아닐 수가 없다. (사실 현재명과 나는 얼굴마담이 맞긴 하다)

현장 티켓

작은 명함 사이즈의 티켓도 만들고 웹프로그램북도 제작했지만, 너무 급하게 만들게 돼서 디자인적으로 만족스럽지 못한 부분들이 있다. 하지만 정말 급했기에 시간이 없었고 되돌릴 수도 없다.

홍보

자퇴하긴 했지만, 그래도 광고를 배우던 사람이고, 인스타그램 홍보엔 그래도 자신이 있었기에 더 잘해내고 싶은 마음이 컸다. 그렇게 잡은 인스타그램 홍보 방향성은 '최대한 깔끔하게'였다. 우리가 극에선 sloppy한 AI나 영상들을 쓰지만 우리 홍보 스타일 자체는 최대한 절제하고 깔끔하게 가고 싶었다.

아빠에게 물려받은 캠코더로 2월부터 우리의 준비과정을 틈틈이 촬영했다. 6mm 테이프로 촬영한 영상을 iMovie를 통해서 DV 전환을 하고 이걸 10초 이내 영상으로 잘라서 인스타그램에 계속해서 업로드했다. 팀 무시무(@mds_26winter). 가장 중요한 오브제인 자라를 메인 포스터에서도, 인스타 홍보용 마스코트로 사용해 보았다.

팀 인스타그램 @mds_26winter 계정(프로필·헤더) 캡처
팀 인스타그램 @mds_26winter 게시물·릴스 그리드 캡처

우리 6명 인원의 팔로워 외 인원을 끌어들이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래도 팔로워의 팔로워까지는 닿을 수 있도록, 그리고 두세 번 정도 시선을 끌만한 후킹이 있도록 업로드 일정을 관리했다. 근데 마지막 일주일은 나도 너무 바빠서 업로드 계획을 완벽히 지키진 못했다. 릴스는 보통 얼굴이 확실히 나오고 대화가 오가는 릴스들이 조회수가 잘 나왔다. 예를 들어, 송미 누나가 술을 마시며 홍상수 영화에 대해 열변을 토하는 릴스가 가장 히트했다. 3회차의 공연에서 선예매를 약 80매 정도 받았으니, 홍보가 잘 진행된 듯하다.

마무리

그 외에도 의자와 책상을 한 번에 당근 해서 가져오겠다며 고생한 재명이와의 하루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무엇보다도 극이 결국 성공적이게 올라갈 수 있도록 노력한 준서 형·재명·홍규·경모·시우, 우리 무시무 팀 전부 너무 고생했다고 다시 또 한 번 말해주고 싶다. 그 외에도 도와준 팀 오리무중 그리고 무대섬 선배들, 보러 와 주고 응원해 준 내 친구들에게 참으로 고맙다고 말하고 싶다.